고니키시 사료집
고니키시 사료집
고니키시(=근구수의 당시 삼국시대 발음) 사료집
===테마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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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략천황기
//웅략천황(雄略天皇) 5년 원문 국역
백제에서 군군(軍君:곤지)을 보냄
날짜
(웅략 5년) 461년 4월
연계
와세다대학 전자도서관연계자료
여름 4월주 001에 백제의 가수리군(加須利君) 주 002[개로왕(蓋鹵王)이다.]은 지진원(池津媛) 주 003을 불태워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적계녀랑(適稽女郞)이다.] “과거에 여인을 바쳐 채녀로 삼았다. 그런데 이미 예의를 잃어서 우리나라의 이름을 실추시켰다. 앞으로는 여인을 바치지 말라.”고 의논하였다. 이에 그 아우 군군(軍君) 주 004[곤지(昆支) 주 005이다.]에게 “너는 마땅히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군군은 “왕주 006의 명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원컨대 왕의 부인주 007을 내려주신다면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면서 “나의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달이 되었다. 만일 가는 길에 출산하면, 바라건대 어디에 있든지 배 한 척에 실어 속히 본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작별하여 왜의 조정으로 갔다.
번역주 001)
아래 내용은 武寧王의 탄생담이다. 이 기사의 특징은 개로왕과 곤지를 대등하게 각각 가 수리군과 군군이라고 부르고 있는 점이다. 또한 전체 내용도 곤지가 왜에 파견된 과정과 무령왕의 출생을 주로 다루고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02)
개로왕을 왕이라고 하지 않고 加須利君이라고 하고 곤지도 軍君이라고 한 것은, 두 사람을 대등하게 인식한 결과로 생각된다. 일본에서도 筑紫君磐井과 같이 유력한 지방호족을 君이라고 하였으나, 王보다는 낮은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03)
『日本書紀』 雄略天皇 2년 7월조 참조.바로가기
번역주 004)
『釋日本紀』 秘訓에 코키시, 코니키시 혹은 코무키시(軍君)라고 되어 있다. 코니키시는 백제에서 왕을 지칭하는 용어에 대한 일본음(『주서』 백제전에는 鞬吉支로 나온다.)으로, 큰 吉士와 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에도 태자는 ‘세시무’, 왕후는 ‘오로쿠’ 등의 古訓이 전하고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05)
『宋書』 夷蠻傳 百濟條에 보이는 征虜將軍 餘昆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文周王 3년조와 동성왕 즉위조에서 문주왕의 동생이자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고 있어, 개로왕의 동생으로 나오는 『日本書紀』와 다르다. 『新撰姓氏錄』에서도 河內諸蕃의 飛鳥部造가 百濟比有王의 아들 琨伎王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어 『日本書紀』의 설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수 있다. 『日本書紀』에서는 곤지가 백제로 돌아간 것은 기록하지 않았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文周王 3년(477) 4월조에서 왕의 아우 昆支를 내좌평으로 삼은 사실과 동 7월조에 곤지가 죽은 사실이 보이므로 477년 이전에 귀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곤지가 왜국에 살면서 낳은 자식은 그가 귀국한 후에도 계속 왜국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중에서 동성왕은 479년에 삼근왕(재위:477~479)의 사망 후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三代實錄』 貞觀 4년 7월조와 동 5년 8월조에 곤지는 飛鳥戶造 등의 조상이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일본에는 곤지왕을 시조로 하는 飛鳥戶造라는 씨족이 있었고, 현재까지 곤지를 모시는 飛鳥戶造신사가 남아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06)
원문은 上君으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07)
원문은 君婦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夏四月, 百濟加須利君[蓋鹵王也.], 飛聞池津媛之所燔殺[適稽女郞也.], 而籌議曰, 昔貢女人爲采女. 而旣無禮, 失我國名. 自今以後, 不合貢女. 乃告其弟軍君[昆주 001支也.]曰, 汝宜往日本以事天皇. 軍君對曰, 上君之주 002命不可奉違. 願賜君婦, 而後奉遣. 加須利君則以孕婦, 嫁주 003與軍君曰, 我之孕婦, 旣當産月. 若於路産, 冀載一船, 隨至何處, 速令送國. 遂與辭訣, 奉遣於朝.
//수인천황기
//수인천황(垂仁天皇) 2년 원문 국역
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의 귀환을 청함/임나와 신라 갈등의 시작
날짜
(수인 2년) B.C.28년(是歲)
연계
와세다대학 전자도서관연계자료
이 해에 임나주 001인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다.”고 청하였다. 아마도 선황의 시대에 알현하러 와서 아직 돌아가지 않았던 것인가?주 002 그래서 소나갈질지에게 융숭하게 상을 주었다. 아울러 붉은 비단주 003 1백 필을 주어 임나왕(任那王;미마나노코니키시, 미마나노코키시)주 004에게 하사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아 이것을 빼앗아버렸다주 005. 양국의 원한이 이때 처음으로 생겼다. [어떤 책(一)에서 말하기를 어간성 천황 주 006의 시대에 이마에 뿔이 있는 사람이 있어 배를 타고 와서 월국(越國;코시노쿠니)주 007의 사반포(笥飯浦;케히노우라)에 정박하였다주 008. 그러므로 그곳을 각록(角鹿;츠누가)주 009이라 이름하였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의부가라국주 010왕(意富加羅國王)의 아들로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츠누가아라시토)이고 다른 이름은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주 011라고 한다. 일본국주 012에 성황(聖皇)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귀화하였다. 혈문(穴門;아나토)주 013에 도착했을 때에 그 나라에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이도도비고(伊都都比古;이츠츠히코)였다. 나에게 ‘나는 곧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제외하고 또 다른 왕은 없다주 014.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틀림없이 왕이 아님을 알고 즉시 다시 돌아왔다. 길을 알지 못해서 섬과 포구에 계속 머물렀다. 북해주 015로부터 돌아와 출운국(出雲國;이즈모)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때 천황주 016이 죽었다. 그대로 머물러 활목천황 주 017을 섬겨 3년이 경과하였다. 천황이 듣고 도노아아라사등에게 “너의 나라에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러고 싶다.”라고 대답하였다. 천황이 아라사등을 불러 “네가 길을 헤매지 않고 빨리 왔더라면 선황을 만나고 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너의 본국주 018의 이름을 고쳐서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라 즉시 너의 국명으로 삼아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붉은 비단을 아라사등에게 주어 본토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 국호를 미마나국(彌摩那國;미마나노쿠니)주 019이라 함은 이것이 연유가 된 것이다. 아라사등은 받은 붉은 비단을 자기 나라의 군부(郡府)주 020에 보관하여 두었다. 신라인이 그것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와서 붉은 비단을 모두 빼앗았다. 이것이 두 나라가 서로 원망하게 된 시초라고 한다. (어떤 책(一)에서 말하기를 ) 처음에 도노아아라사등이 본국에 있을 때 황우(黃牛)에 농기구를 싣고 시골로 갔다. 그런데 황우가 갑자기 없어져 그 자취를 찾아 갔다. 흔적은 어떤 군아(郡衙)주 021 가운데에 있었다. 한 노인이 “그대가 찾는 소는 이 군아에 들어갔다. 그런데 군공(郡公)주 022들이 ‘소가 짊어지고 있는 물건주 023으로 보면 틀림없이 잡아먹으려는 것이다. 만약 그 주인이 찾아오면 물건으로 보상하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잡아서 먹어버렸다. 만일에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고자 하는가?’라고 물으면 재물을 바라지 말고, ‘군내(郡內)에서 제사를 지내는 신을 달라’고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얼마 후에 군공들이 와서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고자 하는가?”라고 물었다. 노인이 말한 대로 대답하였다. 그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흰 돌이어서 흰 돌을 소 값으로 받았다. 그것을 가지고 와서 침실 속에 두자 그 신석(神石)이 아름다운 소녀로 변했다. 아라사등은 몹시 좋아하여 교합(交合)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아라사등이 다른 곳에 간 사이에 소녀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라사등은 크게 놀라 자기 처에게 “소녀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물었다. “동쪽으로 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곧 찾아서 멀리 바다를 건너 일본국으로 들어왔다. 찾는 소녀는 난파(難波;나니하)에 와서 비매어증사(比賣語曾社;히메고소노야시로)주 024의 신이 되었다. 또 풍국(豐國;토요쿠니)의 국전군(國前郡;미치노쿠치노코호리)주 025에 이르러 다시 비매어증사의 신이 되었다. 두 곳에서 나란히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是歲, 任那人蘇那曷叱智請之, 欲歸于國. 蓋先皇之世來朝未還歟. 故敦賞蘇那曷叱智. 仍齎赤絹一百匹賜任那王. 然新羅人遮之於道而奪焉. 其二國之怨, 始起於是時也[一云, 御間城天皇之世, 額有角人, 乘一船泊于越國笥飯浦. 故號其處曰角鹿也. 問之曰, 何國人也. 對曰, 意富加羅國王之子, 名都怒我阿羅斯等, 亦名曰于斯岐阿利叱智干岐. 傳聞日本國有聖皇以歸化之. 到于穴門時, 其國有人. 名伊都都比古. 謂臣曰, 吾則是國王也. 除吾復無二王. 故勿往他處. 然臣究見其爲人, 必知非王也. 旣更還之. 不知道路留連嶋浦, 自北海廻之, 經出雲國至於此間也. 是時遇天皇崩, 便留之, 仕活目天皇逮于三年. 天皇問都怒我阿羅斯等曰, 欲歸汝國耶. 對諮, 甚望也. 天皇詔阿羅斯等曰, 汝不迷道必速詣之, 遇先皇而仕歟. 是以 改汝本國名, 追負御間城天皇御名, 便爲汝國名. 仍以赤織絹給阿羅斯等, 返于本土. 故號其國謂彌摩那國, 其是之緣也. 於是阿羅斯等以所給赤絹, 蔵于己國郡府. 新羅人聞之, 起兵至之, 皆奪其赤絹. 是二國相怨之始也. 一云, 初都怒我阿羅斯等有國之時, 黃牛負田器將往田舍. 黃牛忽失. 則尋迹覓之, 跡留一郡家中. 時有一老夫曰, 汝所求牛者入此郡家中. 然郡公等曰, 由牛所負物而推之, 必設殺食. 若其主覓至, 則以物償耳, 卽殺食也. 若問牛直欲得何物, 莫望財物. 便欲得郡內祭神云爾. 俄而郡公等到之曰, 牛直欲得何物. 對如老父之敎. 其所祭神是白石也. 乃以白石授牛直. 因以將來置于寢中. 其神石化美麗童女. 於是阿羅斯等大歡之欲合. 然阿羅斯等去他處之間, 童女忽失也. 阿羅斯等大驚之, 問己婦曰, 童女何處去矣. 對曰, 向東方. 則尋追求. 遂遠浮海, 以入日本國. 所求童女者詣于難波, 爲比賣語曾社神, 且至豐國 國前郡, 復爲比賣語曾社神. 並二處見祭焉.].
번역주 001)
임나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 참조.바로가기
번역주 002)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 참조. 해외에 파견한 사자가 천황의 사망 후에 귀환한다는 이야기는 田道間守(100년 봄 3월 신미삭 임오조), 阿知使主(응신천황 41년 2월 是月조)에도 보인다.바로가기
번역주 003)
『삼국지』 위서 倭人조에 「倭錦·絳淸縑」 등의 용어가 보인다. 또한 『三國遺事』 延烏郞·細烏女조의 전설도 비단과 관련이 있으며, 신라와 왜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사로 생각된다.바로가기
번역주 004)
왕을 코니키시 또는 코키시로 읽은 것은 『周書』 百濟傳에서 백제의 왕을 ‘鞬吉支’라고 부른다고 적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05)
신라가 물건을 빼앗는 이야기는 분주에도 보이고 있고, 또 『日本書紀』 神功皇后 攝政 47년 4월조와 應神天皇 14년 이 해조에도 보인다. 신라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神代 上 一書(8-4)의 ‘신라국’ 참조.바로가기
번역주 006)
숭신천황이다.바로가기
번역주 007)
현재 福井縣 敦賀市 氣比神社 부근이다.바로가기
번역주 008)
이후의 이야기는 ‘任那入朝’의 기원담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09)
『古事記』 仲哀天皇段에는 ‘都奴賀’란 말이 보인다.바로가기
번역주 010)
『삼국유사』 五伽耶조에 보이는 대가야(고령)라고 보는 설과 금관가야(김해)로 보는 설이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11)
于斯岐는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에도 보인다. 阿利叱智는 阿利斯等과 같은 말이며, 于岐는 소국의 왕호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12)
‘일본국’이란 표기는 빨라도 7세기 후반 이후에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이 용어는 大寶令에 의한 수식문이라 볼 수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13)
율령제의 長門國 서남부로 지금의 下關해협 주변을 가리킨다.바로가기
번역주 014)
외국 사신에게 자신이 천황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日本書紀』 흠명천황 31년 5월조에도 보인다.바로가기
번역주 015)
여기서는 동해의 의미이다.바로가기
번역주 016)
숭신천황이다.바로가기
번역주 017)
수인천황이다.바로가기
번역주 018)
意富加羅國이다.바로가기
번역주 019)
『新撰姓氏錄』 未定雜姓 右京 三間名公조에는 ‘彌麻奈’로 되어있다. 『日本書紀』 숭신천황 65년 7월조 참조. 미마나의 이름에 대해서는 미마키(이리비코)천황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과 반대로 미마나의 이름에서 천황의 이름(미마키이리비코)이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20)
마을의 창고이다.바로가기
번역주 021)
郡衙는 관공서로 郡家, 郡役所라고도 한다.바로가기
번역주 022)
村主 등 촌의 유력자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번역주 023)
田器로 농기구를 의미한다.바로가기
번역주 024)
『延喜式』 神名帳에 「攝津國 東生郡 比賣許曾社」가 보인다. 大阪市 東成區 東小橋 三町目에 위치하며, 원래 天王寺區 小橋町 愛來目山의 産湯稻荷神社 북쪽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古事記』 應神天皇段 天之日矛 설화기사의 분주에서는 比賣碁曾社에서 阿加流比賣神을 제사하였다고 적고 있다. 고소(語曾)가 신라의 居西干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25)
율령제의 豐後國 國埼郡이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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