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 역주 일본서기 참고 문헌들

 동북아역사재단 역주 일본서기 참고 문헌들 // 일본서기 참고문헌 서명 日本書紀 번역자 연민수, 김은숙, 이근우, 정효운, 나행주, 서보경, 박재용 발행자 동북아역사재단 발행일 2013년 12월 10일 현소장처 岩波書店의 日本古典文學大系 『日本書紀』 上·下(天理大學 도서관 소장 卜部兼右本 日本書紀에 의거, 1965·1967) ISBN 978-89-6187-309-3 94910 1. 자료 『古語拾遺』, 『公卿補任』, 『舊唐書』, 『國造系圖』, 『國造本紀』, 『紀氏家牒』, 『紀伊國造系圖』, 『陵墓要覽』, 『大神神社史料』, 『大安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 『大和志』, 『令集解』, 『類聚國史』, 『萬葉集』, 『本朝高僧傳』, 『扶桑略記』, 『備前國風土記』, 『史記』, 『山城風土記』, 『三國佛法傳通緣起』, 『三國史記』, 『三國遺事』, 『三國志』, 『上宮聖德法王帝說』, 『常陸國風土記』, 『西宮記』, 『書紀集解』, 『釋日本紀』, 『先代舊事本紀』, 『善隣國寶記』, 『攝津風土記』, 『聖德太子傳曆』, 『聖德太子傳補闕記』, 『續日本紀』, 『宋史』, 『宋書』, 『隋書』, 『新唐書』, 『新撰姓氏錄』, 『養老令』, 『延喜式』, 『令義解』, 『藝文類聚』, 『元亨釋書』, 『元興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 『類聚三代格』, 『日本三代實錄』, 『日本書紀通釋』, 『日本書紀通證』, 『日本靈異記』, 『資治通鑑』, 『帝王編年記』, 『帝王編年記』, 『住吉大社神代記』, 『周書』, 『地名辭書』, 『晉書』, 『春秋左氏傳』, 『出雲國風土記』, 『太子傳古今目錄抄』, 『播磨國風土記』, 『河內志』, 『弘仁私記』, 『和名類聚抄』, 『懷風藻』 외 다수 중국문헌 姜仁求 외 4인, 『譯註 三國史記』 Ⅰ~Ⅴ,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6~1998. 고려대 한국학연구회, 『가야사론』, 국학자료원, 199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금석문자료집』 Ⅰ·Ⅱ, 1995. 김태식·김익주 편, 『가야사사료집성』 1~3,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飯田武鄕, 『日本書紀通釋』, 內外書籍株式會社, 1930. 백제문화개발연구원, 『백제...

일본서기 경행천황기 - 여구(=오구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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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경행천황기 - 여구(=오구나)의 탄생 경행천황(景行天皇) 2년 원문 국역 3월 원문 국역 도일대랑희(稻日大郞姬)를 황후로 삼음 72년 3월 3일 원문 국역 도일대랑희(稻日大郞姬)를 황후로 삼음 날짜 (경행 2년) 72년 3월 3일 연계 와세다대학 전자도서관연계자료 2년 봄 3월 병인삭 무진(3일)에 파마(播磨;하리마)의 도일대랑희(稻日大郞姬;이나비노오호이라츠메)주 001[어떤 책(一)에서는 도일치랑희(稻日稚郞姬;이나비노와키이라츠메)주 002라 하였다. 낭희주 003는 이라츠메(異羅菟咩)라고 읽는다.]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 황후는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대대황자(大碓皇子;오호우스노미코)주 004이고 둘째는 소대존(小碓尊;오우스노미코토)주 005이라 한다[어떤 책(一書)에서는 황후가 세 아들주 006을 낳았다고 하였다. 그 셋째를 치왜근자황자(稚倭根子皇子;와카야마토네코노미코)주 007라고 하였다.]. 대대황자와 소대존은 한 날 한 배주 008의 쌍둥이로 태어났다. 천황이 이를 이상히 여겨 절구(臼)에게 훈계하였다주 009. 이런 연유로 두 왕을 대대, 소대로 불렀다. 소대존은 또 일본동남(日本童男;야마토 오구나)주 010[童男은 오구나(鳥具奈)라고 읽는다.] 또는 일본무존(日本武尊;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주 011이라 하였다. 어려서도 웅략의 기상이 있었다. 성인이 되자 용모가 크고 훌륭하였다. 신장이 1장이고 힘이 능히 솥을 들 수 있었다주 012. 번역주 001) 『古事記』에서는 吉備臣 등의 선조인 若建吉備津日子의 딸인 針間之伊那毗能大郞女라고 적고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02) 『古事記』에서는 伊那毗能若郞女라고 하고, 伊那毗能大郞女의 동생으로 眞若王과 日子人之大兄王의 어머니라고 적고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03) 郎姬는 여자의 호칭이다. ‘郞媛’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日本書紀』에는 낭희는 6명, 낭원은 1명의 예가 있다. 『古事記』에서는 ‘郎女’로 표기하기도 한다.바로가기 번역주 004) 景行紀 이후는 천황 자녀의 호칭을 ‘命’에서 ‘황자·황녀’를...

필사중_일본서기 경행천황기

필사중_일본서기 경행천황기 // 목차  일본서기 권제7 대족언인대별천황(大足彦忍代別天皇;오호타라시히코오시로와케노스메라미코토) 경행천황(景行天皇;케이카우텐노) 서지정보 간행사 서문 일러두기 참고문헌 해제 컨텐츠검색 ‘일본서기’에서 검색 검색 상세검색 일본서기 자료 시작 페이지로 자료 시작 페이지로 프린트 다운로드 XML보기 오류접수 전체열기 전체닫기 top (총서) 원문 국역 대족언인대별(大足彦忍代別)의 계보와 즉위 과정 원문 국역 경행천황(景行天皇) 원년 원문 국역 7월 원문 국역 대족언인대별(大足彦忍代別: 경행)이 즉위하여 개원함 71년 7월 11일 원문 국역 경행천황(景行天皇) 2년 원문 국역 3월 원문 국역 도일대랑희(稻日大郞姬)를 황후로 삼음 72년 3월 3일 원문 국역 경행천황(景行天皇) 3년 원문 국역 2월 원문 국역 옥주인남무웅심명(屋主忍男武雄心命)을 보내 신기(神祇)에 제사지내게 함 73년 2월 1일 원문 국역 경행천황(景行天皇) 4년 원문 국역 2월 원문 국역 미농국에 행차하여 팔판입원(八坂入媛)을 왕비로 삼음 74년 2월 11일 원문 국역 대대명(大碓命)에게 미농국의 자매를 관찰하라 명하였으나 이행하지 않음 74년 2월 원문 국역 11월 원문 국역 미농국에서 돌아와 전향(纏向)의 일대궁(日代宮)으로 도읍을 옮김 74년 11월 1일 원문 국역 경행천황(景行天皇) 12년 원문 국역 7월 원문 국역 웅습(熊襲)이 배반함 82년 7월 원문 국역 8월 원문 국역 축자(筑紫)에 행차함 82년 8월 15일 원문 국역 9월 원문 국역 무제목(武諸木) 등이 마박(麻剝)을 비롯한 무리들을 물리침 82년 9월 5일 원문 국역 10월 원문 국역 석전국에 도착하여 타원(打猿)을 비롯한 무리들을 물리침 82년 10월 원문 국역 11월 원문 국역 일향국에 머무름 82년 11월 원문 국역 12월 원문 국역 웅습을 평정함 82년 12월 5일 원문 국역 경행천황(景行天皇) 13년 원문 국역 5월 원문 국역 일향의 어도원(御刀媛)을 왕비로 삼음 83년 5월 원문 국역 ...

일본서기 경행천황기 오구나타케루의 옥저 정벌

 일본서기 경행천황기 옥저 정벌 // 권제7 대족언인대별천황(大足彦忍代別天皇;오호타라시히코오시로와케노스메라미코토) 경행천황(景行天皇;케이카우텐노) 옥저명읍(玉杵名邑)으로 건너가 진협(津頰)을 죽임 날짜 (경행 18년) 88년 6월 3일 연계 와세다대학 전자도서관연계자료 6월 신유삭 계해(3일)에 고래현(高來縣;타카쿠노아가타)주 001에서 옥저명읍(玉杵名邑;타마키나노무라)주 002으로 건너갔다. 그곳의 토지주인 진협(津頰;츠츠라)이라는 자를 죽였다. 번역주 001) 지금의 長崎縣 남북 高來郡과 諫早市, 島原市이다.바로가기 번역주 002) 지금의 熊本縣 玉名郡, 荒尾市, 玉名市이다. 六月辛酉朔癸亥, 自高來縣度玉杵名邑. 時殺其處之土蜘蛛津頰焉. 색인어 이름 津頰 지명 高來縣, 玉杵名邑 ========책사풍후의 해석======================== 일본서기 경행천황기 옥저 정벌 // 권제7 대족언인대별천황(大足彦忍代別天皇;오호타라시히코오시로와케노스메라미코토) 경행천황(景行天皇;케이카우텐노) 옥저명읍(玉杵名邑)으로 건너가 진협(津頰)을 죽임 날짜 (경행 18년) 88년 6월 3일 연계 와세다대학 전자도서관연계자료 6월 신유삭 계해(3일)에 고래현(高來縣;타카쿠노아가타)주 001에서 옥저명읍(玉杵名邑;타마키나노무라)주 002으로 건너갔다. 그곳의 토지주인 진협(津頰;츠츠라)이라는 자를 죽였다. 번역주 001) 지금의 長崎縣 남북 高來郡과 諫早市, 島原市이다.바로가기 번역주 002) 지금의 熊本縣 玉名郡, 荒尾市, 玉名市이다. 六月辛酉朔癸亥, 自高來縣度玉杵名邑. 時殺其處之土蜘蛛津頰焉. 색인어 이름 津頰 지명 高來縣, 玉杵名邑 // 사실 저 사건은 서기 3세기 말~서기 4세기 초 무렵에 부여 기마민족의 수장이 함경남도의 옥저를 정벌한 사건을 마치 일본에서 일어난 것처럼 천황가가 조작한 것이리라.  

고니키시 사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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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니키시 사료집 고니키시(=근구수의 당시 삼국시대 발음) 사료집  ===테마 음악===== =============== //웅략천황기 //웅략천황(雄略天皇) 5년 원문 국역 백제에서 군군(軍君:곤지)을 보냄 날짜 (웅략 5년) 461년 4월 연계 와세다대학 전자도서관연계자료 여름 4월주 001에 백제의 가수리군(加須利君) 주 002[개로왕(蓋鹵王)이다.]은 지진원(池津媛) 주 003을 불태워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적계녀랑(適稽女郞)이다.] “과거에 여인을 바쳐 채녀로 삼았다. 그런데 이미 예의를 잃어서 우리나라의 이름을 실추시켰다. 앞으로는 여인을 바치지 말라.”고 의논하였다. 이에 그 아우 군군(軍君) 주 004[곤지(昆支) 주 005이다.]에게 “너는 마땅히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군군은 “왕주 006의 명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원컨대 왕의 부인주 007을 내려주신다면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면서 “나의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달이 되었다. 만일 가는 길에 출산하면, 바라건대 어디에 있든지 배 한 척에 실어 속히 본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작별하여 왜의 조정으로 갔다. 번역주 001) 아래 내용은 武寧王의 탄생담이다. 이 기사의 특징은 개로왕과 곤지를 대등하게 각각 가 수리군과 군군이라고 부르고 있는 점이다. 또한 전체 내용도 곤지가 왜에 파견된 과정과 무령왕의 출생을 주로 다루고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02) 개로왕을 왕이라고 하지 않고 加須利君이라고 하고 곤지도 軍君이라고 한 것은, 두 사람을 대등하게 인식한 결과로 생각된다. 일본에서도 筑紫君磐井과 같이 유력한 지방호족을 君이라고 하였으나, 王보다는 낮은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바로가기 번역주 003) 『日本書紀』 雄略天皇 2년 7월조 참조.바로가기 번역주 004) 『釋日本紀』 秘訓에 코키시, 코니키시 혹은 코무키시(軍君)라고 되어 있다. 코니키시는 백제에서 왕을 지칭하는 용어에 대한...

수인천황기 미마나의 코니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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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천황기 미마나의 코니키시 "아울러 붉은 비단주 003 1백 필을 주어 임나왕(任那王;미마나노코니키시, 미마나노코키시) 주 004 에게 하사하였다. 仍齎赤絹一百匹賜任那王. "_일본서기 수인천황 2년 B.C.28년(是歲) 기사 // 미마나(임나)의 코니키시  미마나의 코키시  미마나의 근구수 임나가라 연맹의 지배자 근구수  주 004  : 왕을 코니키시 또는 코키시로 읽은 것은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서 백제의 왕을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른다고 적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건길지 .... 겐키쉬 ......... 견훤.... 겐훤......

일본서기 경행천황기 오구나타케루의 쿠마소 웅습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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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서기 경행천황기 오구나타케루의 쿠마소 웅습 정벌  (내가 ai로 그린 그림) // 일본무존(日本武尊)이 웅습을 토벌함 날짜 (경행 27년) 97년 12월 연계 와세다대학 전자도서관연계자료 12월 웅습국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람들의 사는 사정과 지형을 살폈다. 그때 웅습에 우두머리가 있었다. 이름은 취석록문(取石鹿文;토로시카야)주 001 또는 천상효수(川上梟帥;카하카미타케루)라 하였다. 그는 일족을 모두 모아놓고 연회를 베풀려 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무존이 머리를 풀어 소녀처럼 꾸미고 몰래 천상효수의 연회에 가서 때를 엿보고 있었다. 그는 칼을 옷 속에 차고 천상효수가 연회하는 방에 들어가 여인들 중에 있었다. 천상효수가 소녀의 용모를 칭찬하고 손을 잡고 한 자리에 앉아 잔을 들고 술을 먹이고 희롱하였다. 이윽고 밤이 깊고 사람도 드물게 되었다. 천상효수는 술에 취해 있었다. 이에 일본무존은 옷 속의 칼을 빼어 천상효수의 가슴을 찔렀다. 아직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 때 천상효수가 머리를 조아리며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가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때에 일본무존이 칼을 거두고 기다렸다. 천상효수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대족언천황 주 002의 아들이다. 이름은 일본동남주 003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천상효수가 또 “나는 나라 가운데 강력한 자입니다.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은 나의 위력에 눌리어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는 많은 용감한 자를 만나보았으나 아직 황자와 같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한 놈의 천한 입 입니다만 존호를 올리려고 하오니 허락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러마.”라고 답하였다. 또 “금후 황자의 호를 일본무황자(日本武皇子)라 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말이 끝나자 가슴을 찔러 죽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일본무존이라고 높여 부르는 연유이다. 그런 연후에 제언 등을 보내어 그 도당들을 모두 베었다. 남은 자가 없었다. 연후에 해로로 왜에 돌아와서 길비(吉備;키비)에 가서 혈해(...